사랑방 쉼터
이곳은 시인과 함께 했던 많은 일들과 아쉬움, 그리움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희망을 싣는 곳입니다.



작성자 관리자 시간 2020-02-27 11:25:42 조회수 1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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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형과 나 사진 2

 

 

나와 형은 8살 차이다. 어린 시절 작은형은 내 기억 속에 없다. 집 뒤 문중산 할아머니 멧등이 반질반질해질 만큼 찢어진 공에 짚을 넣어 축구할 때도, 눈 오는 날 동네 형들이 큰 산에 토기몰이 하러 갈 때도 나는 이렇다 하게 기세를 돋아주고 기댈 형이 없었다. 큰형이나 작은형은 이미 먼 서울에 있던 터라, 아쉬움이 컸다. 특히 작은 형은 중학교에 다닐 때에도 큰형과 학다리고 앞에서 자취를 하였기 때문에, 그나마 형과 어린 시절을 함께 하지 못했다. 그러기에 형에 대해서는 막연한 선망 같은 게 있었다. 어렵고 무서웠던 큰형에 비해서 작은형은 이웃 누님처럼 따뜻했다.

 

 

어느 봄날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은 수신인에 내 이름이 한자 한자 똑똑히 박힌 소포를 건네주었다. 군사우편 직인이 찍혀 있었고 보내는 사람은 조영관, 작은 형이었다. 특유의 지렁이 기어가는 듯한 낯익은 글씨체가 보였다. 소포 안에는 작은 소설책 한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책갈피에 끼워둔 짧은 군사엽서에는 나는 잘 있다. 어려운 환경에도 씩씩하게 자랄 것이라 믿는다뭐 그런 취지의 글이 실려 있었던 것 같다. 그 뒤로 몇 달은 데미안을 읽으면서 선과 악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에밀 싱글레어의 삶을 살았다. 나의 질풍노도, 사춘기는 그렇게 혼자 시작되었다.

 

 

작은형과 함께 살았던 것은 형이 군대를 제대한 후 잠시 동안 시골집 사랑방에서 함께 생활한 몇 개월과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훨씬많았던 서울 한남동 생활, 그리고 인천 가정동에서의 생활이다. 가장 많이, 그런대로 1년여를 함께 생활한 게 인천 가정동 생활이다. 나의 교통사고 합의금과 형이 마련한 돈으로 가정동에 방 2개짜리 작은 반지하 집을 마련하였다. 나는 당시 대우자동차에 입사하기 위해서 자동차정비학원을 다니던 중이었고, 형은 용접을 하러 다녔다.

 

 

사실 형은 일찍 고향을 떠난 탓도 있었지만, 성격이 천상 책상물림이었다. 시골에서 지게질을 할라치면 뒤우뚱 뒤우뚱하다 고랑에 빠지기 일쑤였고, 농약을 해도 한 곳 안한 곳이 보일만큼 듬성듬성했다. 그만큼 그는 농삿일이나 노동일보다는 선비처럼 책 읽고 비평하는 일이 적성이었다. 그런 형이 용접불똥에 손등 곳곳에 물집이 잡히고 손에는 옹이가 박혔다. 구멍 슝슝 뚫린 작업복은 그의 억척스런 열정도 보였지만, 서툰 노동자의 모습도 보였다.

 

 

회식이 별건가,

커팅기에 나무를 퍽퍽 잘라서리

숭숭 구멍 낸 드럼통 안에다가

엇대고 기대고 가새지르고 포개서 올려놓고 설라무네,

설렁설렁 신나 좀 뿌리고 산소 불대를 솔솔 들이대면

아무리 지가 강철 철판이라도 안 오그라지고 배길 것이여.

몇 방 용접 붕붕 지져 스텐 석쇠 만들어놓았겠다

마늘 까놓았겠다

고추, 상추, 깻잎, 씻어놓았겠다, 초장, 된장 사 왔겠다

개뿔이나 뭐가 걱정일 것이여.

- 조영관 [마당회식 ] 중에서

 

 

그는 이렇듯 노동자로서, 으깨지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현장에서 석쇠를 만들고 불을 켜면서 노동하는 즐거움으로 희망을 노래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으면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날리어 로 시작되는 <장산곶 타령>이나 <군밤타령>을 걸판지게 불렀다. 그의 덩실 덩실 추는 춤은 노동의 새벽을 향한 북소리였다.

 

 

그러나 그는 가족들에게 힘든 어깨를 보여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내가 현장을 떠나 공부한다고 할 때, 말없이 어깨를 두드려 주었을 뿐이었다. 그의 장례를 치룬 후 텅빈 의왕 월세집의 집기를 정리하면서, 외롭게 살아왔을, 몸부림치며 살려고 바둥거렸을, ‘울타리에 뿔이 걸린 염소의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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